여행과 역사/🌊 노르망디

[옹플뢰르] 구 항구(Vieux Bassin)의 700년 이야기

여행하는 박강아름 2025. 5. 4.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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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 반사된 시간의 풍경, 
옹플뢰르 구 항구(Vieux Bassin)의 700년 이야기

옹플뢰르 구 항구 (2025/05/04)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슬레이트 지붕의 오래된 건물들이 줄지어 선 모습.
그 건물들이 고요한 수면 위에 반사될 때, 옹플뢰르의 항구는 단순한 ‘항만’을 넘어서 하나의 풍경화가 됩니다.

오늘날 많은 여행자들이 ‘예쁜 항구 도시’로 기억하는 이곳, 하지만 그 아름다움 아래에는 7세기 가까운 격동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작은 항구 도시 ‘옹플뢰르(Honfleur)’가
어떻게 군사 요충지에서 식민지 개척의 출발점이 되고,
다시 노예무역의 거점, 그리고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으로 변모해왔는지를,
‘구 항구(Vieux Bassin)’를 중심으로 따라가 봅니다.


⚔️ 14~15세기: 백년전쟁(1337~1435)과 국가 방어를 위한 전략 요새

1368~1371년, 프랑스 왕 샤를 5세는 잉글랜드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센강 하구에 전략적 해군기지를 조성합니다. 옹플뢰르는 루앙(Rouen)의 클로 데 갈레(Clos des Galées), 아르플뢰르(Harfleur)와 함께 삼각형 방어체계를 이루며 프랑스 왕국의 해상 방어를 담당하게 됩니다. 당시 옹플뢰르는 풍부한 내륙 자원, 숙련된 선원, 그리고 복잡한 해양 지형 덕분에 요새화가 유리한 장소로 평가되었습니다.

“옹플뢰르에 위치한 이 곳은 다양한 장점을 갖추고 있어 선택되었습니다. 그 중 첫 번째는 센 강 입구에 위치한 전략적인 지리적 위치로, 대서양으로의 직접적인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 마을은 요새화되자 프랑스 왕국의 중요한 방어 요새로 기능했습니다.” "Le site honfleurais a été choisi en raison des nombreux atouts qu’il offrait, le premier étant une situation géographique stratégique à l’embouchure de la Seine avec un accès direct à la mer océane... la ville une fois fortifiée constituait une clé de garde du royaume de France." 
- Nathalie Pallu de La Barrière, 2018, p. 27

이 시기 'havre du dedans(안쪽 항구)'을 중심으로 도시 내부에 성벽과 해자가 조성되었으며, 잉글랜드의 공격이 집중되었던 1417년에도 옹플뢰르는 마지막까지 저항한 요새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Nathalie Pallu de La Barrière, 2018).

"이 센 강 만의 지도는 옹플뢰르, 아르플뢰르, 그리고 루앙의 클로 데 갈레 사이에서 형성된 방어 삼각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Nathalie Pallu de La Barrière, " Honfleur à la fin du Moyen Âge, création et évolution de la  défense d’une base navale stratégique",  Annales de Normandie , 2018, n°1, p. 28. © N. Pallu de la Barrière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도시의 성벽은 지속적으로 보강되었고, 항구에는 선박 수리소, 무기고, 저수지 역할의 해자 등이 조성되어 요새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옹플뢰르는 단지 항구가 아닌, 왕실이 직접 관리하고 육성한 국가급 군사기지였던 셈입니다.


🎣 16세기: 북대서양 어장으로의 진출

1506년, 옹플뢰르의 선장 주앙 드니(Jehan Denis)와 항해사 가마르(Gamart)는 옹플뢰르 선박을 타고 뉴펀들랜드(Terre-Neuve) 해역까지 항해하여 대구(morue)를 어획합니다. 이는 프랑스 선박이 북대서양 어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초기 사례로 기록되며, 이후 옹플뢰르는 프랑스 대서양 어업 네트워크의 중요한 거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Étienne Bernet, 1998).

"1506년, 옹플뢰르 출신 선장 주앙 드니와 선원 가마르는 옹플뢰르 출신의 선박을 타고 뉴펀들랜드로 향했습니다." 
"En 1506, le capitaine Jehan Denis et le pilote Gamart, sur un navire honfleurais, se rendent à Terre-Neuve." 
- Étienne Bernet, 1998

1520년대부터는 디에프(Dieppe), 브레아(Bréhat), 페캉(Fécamp) 등 노르망디 항구들도 대규모로 뉴펀들랜드 어업 항해를 조직하며, 옹플뢰르는 이들 항구와 함께 항해, 어획, 어류 가공의 주요 기지로 기능합니다.

이러한 어업 활동은 단순한 생계형 조업을 넘어, 프랑스의 대서양 식민 확장 전략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습니다. 1524년, 프랑수아 1세의 명령을 받은 조반니 다 베라차노(Giovanni da Verrazzano)는 북미 해안을 탐사하고 뉴펀들랜드를 프랑스령으로 선언합니다. 이어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는 1534년부터 1540년 사이 세 차례에 걸쳐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을 탐사하며 식민지 개척의 기초를 닦습니다. 이 시기 옹플뢰르, 루앙, 생말로등의 항구는 탐험과 이민 항해의 출항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Étienne Bernet, 1998).

프랑스 어부들은 이 시기부터 두 가지 방식의 대구 어업을 병행했습니다. 하나는 해안에 정박하여 포획한 물고기를 말리는 정착 어업(pêche sédentaire)이며, 이는 주로 바스크, 말루아, 팽폴(Paimpol) 출신 어부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먼바다에서 어획 후 선상에서 염장 처리하는 유랑 어업(pêche errante)으로, 특히 노르망디 어부들이 특화되어 있었습니다. 옹플뢰르는 이 유랑 어업의 대표적 거점으로, 훗날까지 이어지는 ‘선상 염장 대구(morue verte)’ 중심지가 됩니다.

1536년, 루앙 항에서 출항한 라 카트린느(La Catherine) 호는 왕실 명령에 따라 뉴펀들랜드 어장에서 조업을 수행합니다. 이후 1573년에는 프랑스 150척, 스페인 100척, 포르투갈 50척, 영국 30척이 뉴펀들랜드에서 어업 활동을 벌였으며, 이 가운데 옹플뢰르 출신 선박들은 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Étienne Bernet, 1998).


🧭 17세기 초: 샹플랭과 노예무역의 시작

17세기 초, 옹플뢰르는 어업 항구를 넘어 북미 식민 탐험과 노예무역의 출발지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1603년부터 1620년까지, ‘누벨 프랑스(Nouvelle-France)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무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은 캐나다 항로로의 여덟 차례 항해 중 대부분을 옹플뢰르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는 1603년 3월 15일, ‘라 본느 르노메(La Bonne Renommée)’호에 탑승해 세인트로렌스 강 탐사에 나섰고, 이후 ‘동 드 디유(Don de Dieu)’호를 통해 퀘벡을 건설했습니다(Ouest-France, 2015).

에르네스트 롱자, 《사무엘 드 샹플랭의 가공 초상화》, 판화(Gravure. Portrait factice de Champlain par E. Ronjat.)

“그러나 그는 바로 옹플뢰르에서 누벨 프랑스(새로운 프랑스)로 향하는 여덟 번의 항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 3월 15일, 그는 '본느 르노메' 호에 승선해 출항했습니다. [...] 옹플뢰르에서 건조된 '동 드 디유' 호는 현재 퀘벡의 문장(紋章)에 새겨져 있습니다.”
"C’est pourtant d’Honfleur qu’il va entreprendre huit de ses voyages vers la Nouvelle-France. [...] Le 15 mars, il appareille à bord de la Bonne renommée. [...] Le Don de Dieu, construit à Honfleur, figure aujourd’hui sur les armoiries de Québec." 
- Ouest-France, 26 septembre 2015

이와 동시에, 1629년 옹플뢰르는 프랑스 내 노예무역 항구로 공식 등록되며, 대서양 삼각무역에 진입합니다. 이는 옹플뢰르가 프랑스의 식민 정책과 상업 전략의 양 축을 동시에 담당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1629년, 옹플뢰르는 프랑스의 노예 무역에 참여하는 항구 목록에 포함되었습니다."
"En 1629, Honfleur entre dans la liste des ports français participant à la traite négrière."
- Archives départementales du Calvados, « Honfleur, un port de la traite normande »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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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후반: 콜베르 시대, 항만 도시로의 재구성

루이 14세 시대, 재무총감이자 해군 개혁가였던 장-밥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는 프랑스 해군력 강화를 위해 항만 정비에 착수합니다. 1681년, 콜베르의 명령과 해군 제독 아브라함 뒤켄(Abraham Duquesne)의 요청에 따라 옹플뢰르에는 구 항구(Vieux Bassin)가 조성됩니다. 이는 기존 ‘안쪽 항구(havre du dedans)’를 확장하여 수문과 방파제를 갖춘 부유식 항구로 만든 것이며, 1684년에 완공됩니다. 기존 성벽의 서측은 철거되었고, 항구 수심은 깊어졌으며, 도시 구조 자체가 항만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장-밥티스트 콜베르의 초상화, 필리프 드 샹파뉴 작 (1655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Portrait de Colbert, par Philippe de Champaigne(1655).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

"이 부유식 선착장은 아브라함 뒤켄의 건의와 콜베르의 명령으로 1681년에 건설되었습니다."
"Ce bassin à flot est créé sur les instances d’Abraham Duquesne et par ordre de Colbert en 1681."
- Wikipédia, Le Vieux Bassin d’Honfleur

이 시기 옹플뢰르는 파리와 내륙으로 향하는 중간 보급항 역할을 수행하며, 도시의 항만 구조와 경제 기능 모두 강화됩니다. 주민들은 자비로 ‘플랑셰트 항구’를 건설했고, 이 항구는 오늘날 여객 터미널로 남아 있습니다. 콜베르의 개혁은 옹플뢰르를 국가 전략 항구로 재편하며, 이후 해군 기지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비용으로 작은 항구인 '플랑셰트 항구'를 건설했으며, 오늘날 이 항구는 '여객 항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Ils construisirent alors à leurs frais le petit port appelé port de la Planchette, aujourd'hui port des passagers."
-
Mémoire sur l’état du port d’Honfleur, AD14

콜베르의 개혁은 옹플뢰르를 다시 한 번 국가 전략 항구의 지위로 끌어올렸으며, 대서양 무역, 선박 수리, 군수 보급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복합 항구로 재편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부터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의 해군은 기존의 상업 항만이나 어업 항만을 넘어, 본격적으로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해군 기지를 필요로 하게 되며, 옹플뢰르도 그러한 전환에 포함되었습니다.

“콜베르 시대 이전 [...] 프랑스 해군은 상업, 어업, 경주용 항구에 위치한 기존 시설을 해군 활동에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리슐리외의 군수기지 건설은 크게 실패했습니다.  [...] 특히 르아브르 조선소는 함대 건설의 중요한 중심지로 남아 있습니다.” "Avant la période de Colbert [...] la marine française a utilisé pour ses activités les installations existantes dans les ports de commerce, de pêche et de course... Cependant la réalisation des arsenaux est largement un échec de Richelieu [...] Le chantier du Havre surtout demeure un important centre de construction pour la flotte."
- Alan James et Philippe Haudrère, « Les arsenaux de marine en France avant Colbert », Dix-septième siècle, 2011, pp. 657-665.

결국 옹플뢰르의 항만 개발은 중세의 방어 요새 → 근세의 식민 출항지 → 절대왕정기의 전략 항만이라는 긴 시간축 속에서 지속적 변화와 적응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 18세기: 노예무역의 절정기

1717년, 프랑스 정부는 옹플뢰르에 세네갈 회사(Compagnie du Sénégal)를 설립하고 아프리카 해안과의 교역 및 노예무역을 본격화합니다. 1767년에는 왕실 조례를 통해 노예 1인당 10리브르의 세금을 면제하는 특권이 부여되며, 옹플뢰르는 생말로, 르아브르와 함께 프랑스 대표 노예무역 항구로 부상합니다.

“정부는 그곳에 세네갈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Le gouvernement y établit la Compagnie du Sénégal."
- Archives départementales du Calvados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은 1767년 9월 30일의 왕실 조례(Arrêt du Conseil d’État)였습니다. 이 조례는 옹플뢰르 상인들에게 노예 1인당 10리브르의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권을 부여하며, 옹플뢰르를 르아브르, 생말로와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노예무역 항구로 부상시킵니다.

“옹플뢰르의 상인들은 흑인 1인당 10파운드의 세금을 면제받는다.”
"Les négociants de Honfleur soient exempts du droit de dix livres par tête de Noirs."
- Arrêt du Conseil d’État du roi, AD14 C/4152 (Archives départementales du Calvados)

그 결과, 1783년부터 1791년 사이 옹플뢰르에서 약 50,000명의 아프리카인이 포로로 잡혀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송되었습니다. 이는 노르망디 연안 항구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치 중 하나로 기록되며, 옹플뢰르가 단지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만 기억될 수 없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142회의 노예 무역 출항을 조직하고 약 5만 명의 포로가 강제 이주된 옹플뢰르는 프랑스의 7번째 노예 무역 항구입니다.”
"Avec 142 expéditions de traite organisées et environ 50 000 captifs déportés, Honfleur est le 7e port négrier français."
- Wikipédia, Le Vieux Bassin d’Honfleur


🎨 19세기: 침묵과 재발견, 예술가들이 사랑한 항구

18세기 말 노예무역의 종식 이후, 옹플뢰르는 한동안 경제적 침체를 겪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곳은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바로 화가, 음악가, 작가들의 영감의 원천으로서 말입니다.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 from Loose Studies of Paris and the Seine, Honfleur, Normandy from the West c.1832

이 시기 영국의 윌리엄 터너(Turner)를 시작으로,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Corot),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Jongkind), 외젠 부댕(Boudin), 그리고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클로드 모네(Monet) 등이 차례로 옹플뢰르를 방문하며, 이 항구도시를 캔버스에 담기 시작합니다. 특히 ‘하늘의 화가’로 불린 부댕은 옹플뢰르에서 태어난 대표적 화가로, 이곳의 하늘과 수면 위 빛 반사를 즐겨 그렸습니다.

"외젠 부댕은 두 번의 중요한 도움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보들레르가 그의 작품에 대해 찬양 일색의 기사를 작성했고, 코로트는 그를 ‘하늘의 왕’이라고 칭찬했습니다.”
“Eugène Boudin devient connu grâce à deux coups de pouce, Baudelaire qui écrit un article dithyrambique sur son travail et Corot qui le qualifie de 'roi des ciels'."
- Odile Morain, 2018

또한 에릭 사티(Erik Satie)는 1866년 옹플뢰르에서 태어난 작곡가로, 그의 고향집은 현재 뮤지엄 하우스로 복원되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풍자 작가 알퐁스 알레(Alphonse Allais)도 이곳 출신으로, 예술가적 분위기를 더해줍니다.

19세기 중엽, 생 시에몽(Saint-Siméon) 언덕의 농장(Ferme Saint-Siméon)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집결지로 기능하며, 예술가 공동체의 거점이 됩니다. 모네, 부댕, 용킨트 등은 이곳에 모여 함께 자연을 스케치하고, 빛과 시간의 변화를 실험합니다.

이처럼 옹플뢰르는 19세기 후반부터 ‘예쁜 항구 도시’를 넘어 인상주의 미술의 주요 무대로 떠오르며, ‘화가들의 도시(Cité des Peintres)’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 20세기: 문화유산으로 재정의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옹플뢰르는 큰 폭격을 피하면서도 프랑스의 해안 방어선으로서 여전히 전략적 위치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이후, 더 이상 군사적 기능은 줄어들고, 옛 항구와 도시 전체는 문화유산으로의 전환을 겪게 됩니다.

  • 1933년,  성카트린 부두(Quai Sainte-Catherine)의 목조 슬레이트 지붕 건물들이 역사기념물(Monuments historiques)로 지정되며, 옹플뢰르의 도시 전경 자체가 보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 1983년, 사무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의 흉상이 항구 앞에 설치되며, 탐험과 식민 개척의 역사가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환기됩니다.
  • 20세기 후반부터 옹플뢰르는 예술관광과 유산 관광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도시 전체가 야외 미술관처럼 기능하며, 예술가들의 흔적을 따라 걷는 문화 코스들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또한, ‘외젠 부댕 미술관(Musée Eugène Boudin)’, 메종 사티(‘Maisons Satie)’ 등 주요 문화 시설들이 개관하며, 예술적 기억과 지역 정체성을 공공적으로 재구성하는 흐름이 강화되었습니다.


🧭 21세기: 기억과 윤리의 항구

오늘날의 옹플뢰르는 단지 ‘예쁜 항구’나 ‘화가들의 도시’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특히 최근 들어, 18세기 노예무역 항구로서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성찰하고, 이를 윤리적 기억의 공간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2023년, 칼바도스 주(Archives départementales du Calvados)는 르아브르, 루앙과 함께 "노예제, 노르망디의 기억(Esclavage, Mémoires Normandes)"라는 전시 프로젝트를 공동 기획하여, 옹플뢰르가 수행한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역사적 사실을 대중에게 투명하게 알렸습니다.
  • 이 전시는 단순한 사료 전시를 넘어서, 지역 주민, 예술가, 역사학자, 교육자들이 참여한 기억의 재구성 프로젝트였으며, 과거의 침묵을 현재의 대화로 바꾸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옹플뢰르가 관광 명소를 넘어서, 역사적 책임과 문화적 윤리를 성찰하는 장소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옹플뢰르는 과거의 번영과 예술적 유산을 기리는 동시에, 그 이면의 아픈 역사까지 정직하게 마주보는 항구로 성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전시 : 노예제, 노르망디의 기억 (L’exposition : Esclavage, mémoires normandes)


출처

Archives départementales du Calvados, « Honfleur, un port de la traite normande ».
[En ligne] : https://archives.calvados.fr/page/honfleur-un-port-de-la-traite-normande, consulté le 4 mai 2025.

Bernet, Étienne, Bibliographie francophone de la grande pêche, Fécamp, Association Fécamp Terre-Neuve, 1998.
[En ligne] : https://www.archives.fecamp-terre-neuve.fr/Historique/GrandesDates.html

James, Alan et Philippe Haudrère, « Les arsenaux de marine en France avant Colbert », Dix-septième siècle, 2011, pp. 657–669.
[En ligne] : https://shs.cairn.info/revue-dix-septieme-siecle-2011-4-page-657?lang=fr

Morain, Odile, « Turner, Corot, Satie et Boudin… ces artistes inspirés par Honfleur », Franceinfo, 10 août 2018. Mis à jour le 1er octobre 2018.
[En ligne] : https://www.francetvinfo.fr/culture/musique/jazz/turner-corot-satie-et-boudin-ces-artistes-inspires-par-honfleur_3279491.html, consulté le 4 mai 2025.

Ouest-France, « Champlain, d'Honfleur à la Nouvelle-France », 26 septembre 2015.
[En ligne] : https://www.ouest-france.fr/normandie/honfleur-14600/champlain-dhonfleur-la-nouvelle-france-3721269, consulté le 4 mai 2025.

Pallu de La Barrière, Nathalie, « Honfleur à la fin du Moyen Âge, création et évolution de la défense d’une base navale stratégique », Annales de Normandie, vol. 68, n° 1, Caen, Presses universitaires de Caen, 2018, p. 27-43.
[En ligne] : https://shs.cairn.info/revue-annales-de-normandie-2018-1-page-27?lang=fr

Wikipédia, Le Vieux Bassin d’Honfleur, consulté le 4 mai 2025.
[En ligne] : https://fr.wikipedia.org/wiki/Vieux_Bassin_d%27Honfl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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