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일기/🌊 노르망디

[에트르타] 코끼리 절벽: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과 함께하는 여행

여행하는 박강아름 2024. 12. 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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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 동안 프랑스에서 여행 가이드로 일하면서 에트르타(Étretat)에는 백번 넘게 방문했을 것이다. 에트르타는 주민 약 1,200명이 거주하는,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에 위치한 작은 해변 마을이다.

에트르타 해변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해변 양끝에 서 있는 두 개의 절벽이다. 이 절벽은 침식에 취약한 석회암의 한 종류인 회백색의 백악질(chalk)로 이루어진 터라, 오랜 세월 동안 비, 바람에 깎여 지금의 독특한 아치 형상을 가지게 되었다. 기 드 모파상이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여자의 일생>에서 에트르타 해변에 자리한 이 아치형 절벽을 "물속에 코를 처박은 거대한 코끼리" 같다고 묘사한 후로 사람들은 이 백악질 절벽을 '코끼리 절벽'이라 부른다.

<여자의 일생>의 원제는 프랑스어로 'Une vie', 직역하면 '어느 인생'이라는 뜻인데, 바로 주인공 잔느의 인생을 가리킨다. 잔느는 수도원을 갓 졸업한 후, 노르망디에 위치한 부모님의 풍요로운 영지에서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잔느는 검정색 머리카락과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한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한다. 바로 이 에트르타 해변에서 잔느는 쥘리엥 드 라마르 자작이라는 남자를 향한 첫사랑을 본격적으로 꿈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자작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자작은 결혼 후에 본색을 바로 드러낸다. 자작은 잔느의 하녀인 로잘리를 추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백작 부인과 불륜을 저지른 끝에 결국 백작 부인의 남편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잔느가 에트르타에서 느꼈던 자작에 대한 설렘과 에트르타의 아름다움은 참 강렬하다.

저 멀리 뒤쪽에서는 페캉의 하얀 방파제로부터 갈색 범선들이 출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쪽 저 멀리에는 괴상한 바위가 솟아 있었는데, 중간에 구멍이 훤히 뚫린 그 둥그스름한 바위는 물속에 코를 처박은 거대한 코끼리와 비슷한 형상이었다. 그것이 에트르타의 작은 관문이었다.
(...)
잔느가 감동하여 속삭였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자작이 대꾸했다. "오, 그래요. 아름답군요." 이 아침나절의 청명한 빛이 그들 마음속에 메아리처럼 솟아올랐다.
(...)
배가 햇볕에 닿았다. 맨 먼저 내린 남작이 밧줄을 당겨 배를 기슭에 고정하는 동안, 자작은 잔느의 발이 물에 젖지 않게 그녀를 두 팔로 안아 땅 위에 내려 주었다. 그러고서 그 두 사람은 잠깐 몸을 얼싸안았던 것에 흥분을 느끼며, 나란히 올라갔다. 갑자기 그들 뒤에서 라스티크 영감이 남작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튼 두 사람 잘 어울리는 한쌍이 되겠네요."

- 기 드 모파상, 여자의 일생, 이동렬 옮김, 민음사, 2014, pp.49-51.

 

팔레즈 다몽(Falaise d'Amont) (202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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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잔느와 자작은 배를 타고 에트르타에 도착하지만, 나는 파리에서 약 2시간 30분 동안 차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다. 잔느와 자작은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 5시 즈음에 에트르타를 떠나지만, 나는 손님들과 이곳에서 길어야 1시간 정도 머물다 떠난다. 하지만 잔느와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에트르타의 첫 관문이 바로 이 코끼리 절벽이라는 점이다.

나는 바닷물 속에 꿋꿋하게 서 있는 이 회백색 코끼리 절벽을 볼 때마다 에트르타와 사랑에 빠진다. 매번 처음 사랑에 빠진 것처럼 새롭게 새롭게 말이다. 잔느에게 에트르타는 첫사랑의 배경이었지만, 내게 에트르타는 사랑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회백색 절벽 앞에 설 때마다 종종 잔느와 백작의 데이트 장면을 떠올리며 스스로 백악질 절벽이 되어 보곤 한다. 무려 백악기 때 만들어졌다고 해서 백악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절벽 말이다. 수많은 풍파를 겪었을 나, 수많은 여행객이 도착하고 떠나는 이 에트르타 해변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억할까? 글쎄. 문득, <여자의 일생>에서 로잘리가 나이가 든 잔느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잔느의 풍파가 조금은 덜 아프게 느껴지는 묘약같은 문장라고 생각한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

- 기 드 모파상, 여자의 일생, 이동렬 옮김, 민음사, 2014, p.350.


하지만 나는 아직 덜 깎였을까. 나는 잔느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잔느, 네가 자작에게 느낀 건 사랑이 아니었어. 그건 한 순간의 낭만이었을 뿐이야. 그것이 사랑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자작과 배를 타고 절벽을 보러 한 100번 즘은 왔었어야지. 그리고 100번도 넘게 비, 바람에 깎인 절벽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었어야지. 이것이 사랑인지."

나는, 노르망디를 누비며 자연과 사랑에 빠졌어야지. 왠 남자냐 싶은 것이다.

한때, 짧게 머무는 손님들은 에트르타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00번 넘게 에트르타에 오면서 그런 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차피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진면목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라도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 애초에 진면목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잔느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 말고 자연과 빠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에트르타 해변에 들어설 때 마다 잔느의 첫 감탄을 떠올리며 말한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나는 에트르타의 이 절벽과 해변과는 매번 새롭게 마음껏 사랑에 빠진다. 모진 풍파를 경험한 이 백악질 절벽 앞에 서는 것이 나는 좋다. 왜 사람들이 산에 오르고, 바다에 가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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